• 걸어온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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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및 유년시절

  • 전남 여수 거문도에서 태어나다.
    1895년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영국이 점령했던 섬.동백섬과 등대, 그리고 백도 관광으로 알려진 섬. 거문도(巨文島)
    1965년 저는 이 곳 거문도에서 3남 2녀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섬 치고는 제법 큰 상점을 운영하시며 어업을 하셨고, 어머니는 2년 터울로 자식을 낳으셨는데, 저를 가장 수월하게 낳으셨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 보니 몸집은 작은데 코는 지금처럼 오뚝했다고 지금도 회상을 하시곤 합니다
  •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유학길에 오르다.
    저는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키도 작고 나이도 한 살 어린 탓에 골목대장 노릇은 못했지만, 바다를 벗 삼아 어린 시절은 늘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을 때 부모님은 용산고등학교를 다니던 큰 형만 서울에 하숙을 시키기가 불안하셨던지 5형제를 모두 서울로 유학을 보내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서울 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은 신촌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아무래도 대학이 가장 많이 있는 그 곳이 면학분위기가 좋을 것이라고 생각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 학력에는 창서초, 중동중, 한성고 졸업의 이력이 붙게 되었습니다.

학창시절

  •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여 새로운 세상을 보다
    저는 국문학도가 되고 싶은 생각이 있었지만, 부모님은 뜻에 따라 연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였고, 곧바로 고시 준비를 시작 했습니다. 그런데, 백양로에 사복경찰이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도서관 유리창을 깨고 나온 이름 모를 선배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그동안 보와 왔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결국, 입학 첫 해 4월 19일 처음 학내 시위에 참여해서 돌멩이를 들었습니다. 또한, 선배의 안내에 따라 사회과학 서적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고민은 깊어 졌습니다. 이런 중에 광주 학살의 주범이 대통령으로 있는 나라에서 판검사가 된들 권력의 시녀노릇밖에 더 하겠느냐는 선배의 충고는 저로 하여금 고시 관련 서적을 되팔게 만들었습니다. 구류, 건대 사건 때의 극적인 탈출, 수배 등 고난의 길이 본격화 되었지만 정의가 우리 편이라는 믿음 때문에 왠지 두렵지 않았습니다.
  • 학생운동의 방향을 바꿔 6월 항쟁을 승리의 밑거름이 되다.
    87년 6월 항쟁이 있던 해, 저는 전대협의 모태인 서대협의 연대 사업을 총괄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재야 단체를 중심으로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를 만들었는데 대표로 찾아가 가입 신청을 했더니 보기 좋게 거절 하더군요. 과격한 학생들이 참여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아무리 과거 폭력적인 학생운동이 아니라고 설명해도 받아들여 주질 않았습니다. 궁여지책으로 민청련 등 재야 선배들과 비공식 채널을 유지하게 되었고, 그 연결 고리는 87년 6월 항쟁 승리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재야 선배들도 87년 5월 종로2가에서의 비폭력 시위와 6월 항쟁 승리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재야 선배들도 87년 5월 종로2가에서의 비폭력 시위와 6월 10일 민주 항쟁을 시작할 때 까지 학생들의 변화된 운동방식을 지켜보면서 비로소 안심을 하는 눈치였습니다. "한사람의 열 걸음 보다, 열사람의 한걸음을" 이라는 전대협의 대표 슬로건은 오늘도 여전히 의미 있는 구호임에 틀림없습니다.
  • 나라사랑 청년회에서 아내를 만나다.
    88년에 저는 허인회 선배 등 뜻있는 분들과 나라사랑 청년회를 만들었습니다. 6월 항쟁에 참여했던 명동의 넥타이 부대가 참여할 대중적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몇 몇 운동권들만의 모임이 아닌, 모든 회원의 자발적 참여로 활발히 운영되었던 청년회 방식은 전국적으로 새로운 청년운동에 모범이 되었고, 바로, 이 나라사랑 청년회에서 평생을 함께 할 아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구·시의원 시절

  • 국회의원 비서관으로 국회입법 과정을 배우다.
    92년 국회 신계륜의원의 비서관으로 처음으로 국회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첫 국정감사 준비를 하며 매일 밤을 새웠지만, 입법과 나라 전체의 예산을 직접 다뤄본다는 것은 저에게는 새로운 세상을 눈뜨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던 중 지방자치를 본격 시행한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마침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 풀뿌리부터 변화시키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작은 변화라도 스스로의 참여로 완성해야겠다는 생각에 노원구 의원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 본격적인 지방자치의 시작으로 노원구의원이 되다.
    95년 노원구 상계9동에서, 과분하게도 서울에서 두 번째로 많은 지지를 받아 노원 구의원이 되었습니다. 당시는 과도적 상황이라 임기가 3년이었는데, 저는 3년간 노원구 주민의 생활상의 문제점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는 과정이었습니다. 특히, 노원구에 공급될 예정이었던 지역난방의 문제점과 대안을 만들던 일, 다수 주민의 생활공간인 아파트 관리 제도를 보완하는 일, 주민 생활과 다른 낡은 조례를 고치는 일 등은 노원구 뿐 아니라 인근 지역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주공 12단지에서 처음으로 아파트 축제를 개최한 것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습니다.
  • 최연소 서울시의원으로 교육을 배우다.
    98년에는, 서울시의원 104명 중 최연소 시의원이 되었습니다. 인구가 전국의 1/4이고 예산도 10조원이 넘는 도시 서울, 시의회 활동은 국회의원에 버금갈 정도로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의 장이었습니다. 비록 무보수 명예직이었지만, 비서 한명 없이 혼자서 모든 일을 해야 했던 상황 이었지만, 타인을 위한 삶을 살 수 있음에 보람도 많았습니다. 문화교육보건사회위원회 간사로 활동당시, 덕분에 상경중학교에 수영장 겸용 체육관을 건립하는 등 노원구 내 대다수 초등학교의 교육환경을 개선할 수 있었고, 노원마을 숲 가꾸기 시민모임 운영위원장으로 아파트 단지 내 이름 모를 나무들에게 이름표를 달아주고, 청소년들을 위한 노원구청소년 문화한마당을 개최하는 등 노원의 교육, 문화,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청와대 비서관 시절

  • 청와대 정책조정 비서관이 되다.
    연간의 서울시의회 활동을 마치고, 저는 시의원 재선에 도전했지만,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는 시련이 아니라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시의원 낙선 이후 서울시의회 경험을 바탕으로 민주당 정책위원회에 복지담당 전문위원이 되었고, 참여정부의 탄생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를 거쳐 청와대에서 국가정책을 담당하는 기회가 찾아 왔기 때문입니다. 3년간의 행정관(3급 공무원) 활동을 통해 대한민국의 모든 정책을 두루 다루는 경험을 쌓게 되었고, 2006년 8월에는 청와대 정책조정비서관(1급 공무원)이 되어 대한민국 정책 전체를 조정하는 역할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우리나라가 선진국보다 2년 늦은 취업과 5년 빠른 퇴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5제도」를 창안했고, 실질적으로 부동산 가격 안정을 가져온 주택 청약제도 개편 및 분양원가 공개제를 도입했으며, 2차 남북 정상회담의 경제 사회분야 의제를 총괄하는 등 참여정부 후반기의 정책을 기획 조정하였습니다. 그밖에도 제주 영어 도시 계획을 총괄하고, 바이오 디젤 사용을 현재 0.5%를 3%로 늘리는 등 여러 부처에 걸친 복잡한 문제를 종합적으로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 대통령 후보 정책기획실장으로 대선 정책 기획을 총괄하다.
    정동영 대통령 후보의 정책 기획실장으로, 가족 행복과 차별 없는 성장을 위한 핵심 공약 20가지를 총괄 기획하고 개발하였습니다. 비록, 이명박 당선자의 BBK 의혹으로 초점이 집중되면서 국민들의 이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수도권 요지 2억원 아파트, 수능영어 폐지, 노인기초연금 2배 인상, 중견기업제도 신설, 권역별비례대표제 도입 등 이명박 당선자의 공약보다는 훨씬 더 가치 있는 공약을 만들었다고 자부합니다. 이 공약들은 아직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대안 있는 야당활동의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