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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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동 유래

공릉동의 명칭은 공릉제1동에 있는 공덕리와 공릉제2동에 있는 능골에서 유래되었다.

1963년 1월 1일 서울시로 편입될 때에는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이 있다 해서 태릉동이라 했는데 이 지역 가운데 마을이 먼저 형성되었던 공덕리 주민들의 반발로 공식적인 태릉동을 명칭으로 사용하지 못하였다. 얼마 후 공덕리 주민들과 안골 사람들이 모여 양쪽 마을의 첫 글자를 각각 따서 공릉동이라 부르자는 제의에 따라 공식 명칭은 공릉동으로 확정되었다.

공릉동은 조선초까지 경기도 양주목 노원면 지역에 해당되었다가 갑오개혁 때 전국의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 공덕리 안골(內洞),무수동(無愁洞),묘동리(廟洞里),능골(陵里)과 양주군 망우리면 묵동리(墨洞里) 일부가 이에 속했다. 1914년 4월 1일에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과 해등촌면(海等村面)을 합쳐 노해면(盧海面)으로 하면서 이 지역은 공덕리로 바뀌어졌고 1963년 1월 1일 서울시 성북구로 편입되면서 새로 마련된 노해출장소의 관할지역이 되었다. 1973년 7월 1일 도봉구의 신설로 도봉구 공릉동이 되었으며 1988년 1월 1일 노원구가 신설됨에 따라 노원구 공릉동으로 되었다. 공릉동은 크게 세 지역으로 나뉘는데 월계동과 접한 쪽과 주거지역, 옛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자리인 지금의 국립서울과학기술대학과 서울여대가 있는 교육지역과 선수촌이 있는 선수촌지역이다. 이 때문에 공릉동의 동부지역에 속해있는 태릉지역을 별개의 동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공릉동의 명칭이 유래된 공덕리는 지금의 공릉제1동 일대이고 능골은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과 그 아들인 명종의 능이 있어서 능골이라 하는 지역은 지금의 공릉동 동쪽지역에 해당된다. 공릉동의 중심이 되는 태릉에 모셔진 문정황후는 중종의 계비로 1517년에 간택되어 궁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윤지임(尹之任)의 딸이다. 왕비로 간택될 무렵 병이 나서 후보명단에서 빠지게 되고 대신 윤금손(尹金孫)의 딸을 계비로 결정하였으나 중종이 「윤지임의 딸이 병이 나은 후 윤금손의 딸과 함께 궁중으로 데리고 나오라」는 말 한마디로 극적인 운명을 맞게 되었다. 윤지임의 딸이 왕비로 간택되기 직전 어느 유명한 점쟁이가 서울에 와서 자신의 점을 쳐보다가 주변사람들에게 「오늘은 첫새벽에 귀한 손님이 오니 집 안팎을 깨끗이 치우고 그 분을 정중하게 맞아들이도록 하라」며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하인이 바깥에 웬 손님과 노복 한사람이 찾아왔는데 이 손님이 아까 말씁했던 분이냐고 물었다. 점쟁이는 얼른 정중히 모시라고 분부하는 한편 버선발로 마당으로 뛰어내려가 얼른 댓돌아래 엎드리며 안으로 드시라고 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이 놀라면서 행색도 초라하고 시종꾼도 없는데 무슨 귀한 분이냐고 콧방귀를 치자 그는 귀한 분이니 어서 극진히 모시라는 명령을 재차 하였다. 윤지임이 방안으로 들어오자 점쟁이가 상좌에 앉을 것을 권하며 거듭 절을하고 품 안에 넣어왔던 딸의 사주를 보여주면서 매우 병이 위독한데 생명이 얼마 남았는지 물었다. 점쟁이는 사주가 적힌 종이를 공손하게 받아들고서 「곧 병이 나을 것이며 조만간 국모로 나아가실 사주입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십시오」라 하였다. 이 발에 윤지임은 가지고 왔던 돈꾸러미를 던져주고 나왔는데 그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종의 계비로 책봉되었다. 궁안에 들어간 윤지임의 딸은 중종의 사람을 독차지하였으며 장경왕후가 낳은 원자(仁宗)를 친아들처럼 여기고 거두자 중종은 더욱 그녀를 아끼게 되었다. 1544년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했으나 8개월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12살 밖에 안된 명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어 윤지임의 딸 문정왕후는 대왕대비로 섭정을 하게 되었다. 왕 뒷자리에 앉아 국사의 결정을 하는 대왕대비를 위해 발을 쳤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수렴정치를 한 역사적 인물로 꼽는다. 문정왕후는 강원감사 정만종이 천거한 보우를 등용하여 봉은사 주지로 발령하였는데 보우는 경국대전의 법조문에 의해 능침에 침입하여 난동을 부리고 물건을 훔치는 유생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알고 이 가운데 대표적인 황언징을 처벌하였다. 능침보존을 했다는 이유로 문정왕후의 신임을 더욱 받게 된 보우는 억압받아 오던 조선조의 불교중흥에 힘썼다. 우선 봉은사를 선종, 봉선사를 교종의 본산으로 삼아 승과를 부활하여 이 시험에 합격한 사람에게만 일종의 신분증인 첩(牒)을 주어 승려신분을 보장하였으며 승과제도의 부활에 따라 휴정,유정 등과 같은 고승도 발탁할 수 있게 하였다. 선교일체론(禪敎一體論)을 주장하여 선종과 교종이 서로 다르다는 당시의 불교관을 바로 잡았고 일정설(一正說)을 정리함으로써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한편 봉은사와 봉선사에는 방을 붙여 잡된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시켜 유생들의 횡포를 막게 했는데 조선시대에는 처음 있는 일이어서 유생들의 심한 반발을 받았다. 이 때문에 유생들은 보우를 미워하였고 보우의 이같은 조치는 문정왕후가 배후에서 조정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여 보우,문정왕후와 유생간에는 치열한 암투가 전개되었고 문정왕후의 승하 직후 유생들은 보우의 배척과 불교탄압의 상소를 올렸는데 이에 위협을 느꼈던 보우는 설악사로 은거하였다. 그러나 보우를 시기하고 있던 한 승려의 고발로 잡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제주목사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의 북쪽에는 아들인 명종과 며느리 인순왕후가 안장되어 있다. 쌍릉(雙陵)으로 두 개의 봉분이 나란히 마련된 이 왕릉을 강릉(康陵)이라 한다. 불교중흥정책을 전개했던 문정왕후가 1565년 세상을 떠나자 명종은 여론에 따라 보우를 처단하고 다시 유교진흥책을 전개하는 등 왕권회복과 강화에 힘썼으나 병약했던 관계로 2년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2살에 왕위에 올라 22년간 왕노릇을 하였지만 20세까지 문정왕후가 섭정을 했고 그 후에도 효성스러운 명종은 문정왕후가 시킨대로 했으므로 실제로 독자적인 왕정을 전개한 것은 모후가 죽은 다음부터이므로 2년에 불과하다. 명종보다 8년간 더 살았던 인순왕후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鋼)의 딸로 15살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시어머니되는 문정왕후에 억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였던 인물이었다. 태릉과 강릉, 2기의 왕릉이 한 동네에 있으므로 여기에 대한 경비는 삼엄했었다. 능 앞을 지날 때는 아무리 높은 지위에 있더라도 말에서 내려야만 했고 고개를 숙이고 엄숙한 자세를 취하였다. 물론 근처에 인가가 조성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5리 이상은 떨어진 곳이라야 사람들의 주거가 겨우 허락되었고 능주변의 야산이나 숲에서 땔나무를 할 수도 없었다. 서울여자대학교 근방을 비실골 혹은 비선골,비스리골이라고도 하는 것은 하마비(不馬碑)가 이곳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마비 앞에서 지킨대로 하지 않으면 당장 관할 관청으로 끌려가 물고를 만났기 때문에 비선골 사람들의 말은 대단히 위력을 가졌다. 태릉,강릉의 조성과 함께 생겨난 동네 가운데 하나가 신주막마을이다. 93번지 일대인데 새술막마을이라고도 하며 한적한 이곳에 왕릉을 만들 때 동원된 인부들과 관리들이 드나들면서 생겨다. 왕 일행의 동구릉 능행이 있을 때면 덩달아 일손이 바빴던 동네였으나 1970년 푸른동산에 사격장을 비롯한 각종 시설물이 해마다 들어서게 되고 왕릉을 일반인에게 개방하면서 인근에 행락객을 상대로 한 음식점이 새로이 등장함에 따라 새술막마을의 전통성을 잇게 되었다. 특히 옛부터 태릉부근에 많은 소나무밭이 있어서 솔밭이라는 애칭으로 도심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원족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1970년대 중순부터 곳곳에 서민을 위해 돼지갈비를 재료로 하는 갈비집이 문을 열게 되면서 태릉갈비라는 고유명사를 만들어냈다. 230-1번지에 있는 육군사학교는 1946년 5월에 창설된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에서 그 연원이 시작되는데 조선경비사관학교로 변경되었다가 정부수립과 함께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의 1기생 88명은 군경력자들로 45일간의 교육으로 임관되었고 3기생부터 6기까지는 3개월, 7기는 4개월, 8,9기는 6개월 교육으로 임관되었으며 10기생은 육군사관학교 생도1기가 되며 생도2기부터 정식으로 4년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생도1기생은 졸업식 하루전에, 생도2기생은 입교한 지 20여일만에 한국정쟁이 발발함에 따라 포천,태릉,수원 등지의 전투에 투입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이런 역사를 지닌 육군사관학교 정문 앞 일대를 범다미마을이라 하는데 이 일대에서 방목하던 말을 호랑이가 물어가서 학교 뒷편 골짜기에서 잡아먹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서울산업대학교가 있는 공릉동 172번지 일대는 무시울,무수울,모시울,무수동(無愁洞)으로 불렀는데 무당이 살던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명칭이다.

1935년 무수동에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가 세워지면서 이 곳에 살던 사람들은 달랑지고개 너머 지금의 서울여자대학교 후문쪽으로 이전하여 동네를 형성하면서 마을이름을 고개이름에서 따와 달랑지마을이라 하였다. 오십여미터 높이에 불과 하지만 불암산의 지맥이어서 수림이 울창하고 호랑이,범과 같은 맹수류가 많이 서식하고 있어서 대낮에도 횃불을 들고 종을 울리며 넘어가기 때문에 달구지에 종을 달고 넘는 고개라는 뜻에서 달랑지고개라 하였고 고개 아래 마을은 달랑지마을이라 하였다. 205번지 일대로 한국전력공사 서울연수원에서 경춘선 철로쪽으로 넘어오는 고개 좌우에 형성된 마을은 작은 달랑지마을이라 했는데 광복 직후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으므로 달랑지 마을 두 개라는 뜻에서 따불마을이라는 이름으로도 통했다. 한편 공릉동에는 각종 국제대회에 출전하여 나라는 빛내는 체육인들의 합숙훈련장소인 태릉선수촌이 있다.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던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출전 선수들은 물론, 많은 선수들이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려는 굳은 결의로 태릉선수촌에서 합숙 강훈을 받았다. 영욕과 좌절이 함께 숨쉬는 선수촌은 묘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던 곳이었다. 중계동과 경계되는 지점에 달맞이산 혹은 묘산(廟山)이라 부르던 동산이 있어서 마을이름이 유래되었는데 이산에 많은 무덤들이 있었고 특히 태릉과 강릉의 능제(陵祭)를 위한 준비를 전자각(丁字閣)에서 하므로 묘산이라는 명칭이 붙었으며 묘산의 앞쪽에 위치하므로 묘동이라 하였다. 묘산은 천하명당으로 기운이 뻗쳐 왕후장상(王候將相)이 배출되는 땅이라는 전설이 전해오는데 1937년 서울~춘천을 잇는 사설철도인 경춘선이 개설될 때 지기(地氣)가 끊어진다고 묘동 노인들이 탄식하며 하나둘씩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묘동의 중심지가 태릉선수촌으로 조성되면서 지금은 젊은이들의 기운이 국세를 세계로 떨치는 훈련장소로 바뀌어 오히려 국운을 밝게 해주는 장소로 바뀌었다. 원래 묘동은 묘산에서 이어졌기 때문에 지형이 가파르고 음습하여 사람들이 거주하기에 적합치 못하던 곳이었다. 이러한 곳에 처음 동네를 만든 때는 임오군란이 일어나던 1882년 무렵인데 선혜청 당상으로 임오군란이 발발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 준 이가 민겸호(閔謙鎬)였고 그의 서자 가운데 한사람이 신식군대와의 차별에 반대하여 분노를 일으킨 구식군인들 가운데 일부가 자신의 집으로 쳐들어와서 창고지기를 현장에서 타살하고 그 길로 궁중으로 들어가 아버지 민겸호를 죽인 것은 물론 고모인 왕비 민씨까지도 찾아내고자 혈안이 된 상태에서 평복을 입고 궁을 빠져나가 장호원을 거쳐 충주까지 피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비록 서자이기는 하나 민겸호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분노한 사람들이 알면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 백정(白丁)으로 가장, 장호원 쪽으로 도망하려 하였다. 그러나 왕십리를 거쳐 장호원까지도 성난 군인들이 열을 지어있다 하여 태릉 묘동까지 온 민겸호의 서자는 그곳에서 일체 외부와 접촉을 끊고 눌러 앉아 살면서 민(閔)이라는 성씨에서 문(門)변을 떼어내고 문(文)으로 성을 삼고 백정과 똑같은 생활을 하며 한 여인을 얻어 자식까지 얻었다. 몇 년이 지난 후 종실에서 강릉의 치제(致祭)를 위해 행차하다가 민겸호의 서자를 발견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사대부 집안의 서자가 집안을 더럽혔다 하여 그 자리에서 자결할 것을 강요하여 종실의 한 사람이 내민 비상을 먹고 죽었다. 민겸호의 저사라는 사실도 모르고 그와 함께 살던 여인은 영문도 모른체 피를 토하고 죽어 있는 남편을 염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마니로 싸러 골짜기에 묻었고 겨우 다섯 살 난 아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문씨인줄 알고 나무를 깎아 문(文)이라는 묘지문(墓地文)을 세웠다. 이 때문에 훗날 사람들은 그 무덤을 묘문(墓文)이라 했는데 점차 변해서 묘산(廟山)으로 바뀌어졌다. 그 아들은 커서 일제 떼에 친일파의 거두가 되어 악락한 수법으로 한인(韓人)을 몹씨 괴롭혔는데 경춘선이 개통되고 얼마 안되어서 기차에 치어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원인을 알 수도 없었는데 동네사람들은 그가 너무나 악랄해서 하늘이 내린 벌을 받은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경춘선은 1937년 7월 25일 개통된 사설철도인데 경춘철도주식회사(京春鐵道株式會社)에서 만들었으며 공릉동에 신공덕역을 건설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가 1936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신공덕역은 이곳으로 통학하는 학생들과 교수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것이있다. 경춘선은 광복 이듬해 적산재산으로 규정하여 미군정청 운수부에서 인수하여 국유화하였다.

서울산업대학교 안에 있는 연못은 1936년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를 만들 때 생긴 것이다. 묘산에서 비롯된 크고 작은 골짜기는 계곡과 개울을 만들었고 다시 중랑천으로 유입되는데 이 천변을 이용하여 자연스레 경작지가 형성되었다. 특히 공릉동 543번지 일대는 중랑천변으로 미나리가 많았으며 위례상고 자리까지 이어지는 곳은 채소밭으로도 유명했다. 습지와 경자지가 고대로 계속되는 이 일대 넓은 땅 위에 대학 신축을 결정했을 때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은 계곡을 메워 평지로 만들 경우 배수(排水)가 잘 안되어 기초공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공사장 인부 가운데 한사람이 물이 나오는 곳을 그대로 두고 연못을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이에 따라 만든 것이 연못인데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기전까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학생들의 낭만이 서려진 연못이었다. 잡초가 우거진데다가 워낙 외진 속에 위치한 학교터여서 서울대입시에 실패한 고3 수험생이 마침내 몸을 던진 곳이라느니, 또 학생들사이에는 한밤중 속옷바람으로 이 연못을 한바퀴 돌아야만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등 갖가지 소문이 난무하였다. 가을에 열리는 서울공대생의 축제인 불암축제도 연못 가장자리를 한바퀴 돌아오는 것으로 끝을 맺곤 하였는데 서울산업대학교가 새로 들어오면서 연못 주변을 정리, 자연 그대로의 멋은 사라졌다. 서울산업대학교 뒷골짜기를 작은골이라 했으며 이곳에는 한국전쟁 전만에도 여우가 서식하고 있어 여우방굴 혹은 여우골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렀다. 밤중에 민가로 내려와 가축을 잡아가는 여우를 잡기 위해 덫을 놓았는데 이튿날 아침 덫에 걸려 신음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h을 놓은 사람의 자식들이어서 산신령이 여우로 변신한 것이라 여긴 사람들이 규칙적으로 제물을 바치고 신당을 차려 제사까지도 지내주게 되었다. 부처님을 모셔놓았으므로 불당(佛堂)이라고도 하였는데이 지역이 서울로 편입될 무렵 기독교 계열 광신도(狂信徒) 한 사람이 우상숭배라 하여 불당을 부수고 석유를 끼얹어 불태우고 자신도 타죽은 후로 이름만 남아있다. 공릉동 지역 가운데 태릉 쪽은 역사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기습적인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외출,외박을 나갔던 군인들에게 국군장병은 즉시 원대복귀하라는 내용의 가두안내방송이 시작되자 외출중이던 육사생들도 귀대하였다. 예기치 않았던 상황에 대해 육군본부에서는 1,2,3중대와 중화기중대로 구성된 육사생도들에 대해서도 출동명령을 하여 생도들은 양주군과 포천군의 경계지점인 부평리(富坪里)전투에 투입되었다. 전투경험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입교한지 겨우 이십일 밖에 되지 않은 생도2기까지 전선에 투입된 상황이 동시에 군수품도 부족하여 점차 수세에 밀려나던 중 오후 늦게 육군본부에서 후퇴명령이 전달되었다. 이 명령에 의해 제1기생 27명, 2기생 2명 등 29명의 희생자를 내고 학교로 돌아온 생도들은 육사를 포격대상으로 삼은 적의 전술에 의해 마침내 동 27일에는 학교를 버려두고 전면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태릉 옆 서쪽골짜기는 은산옆이라 했는데 능이 워낙 커서 산처럼보였기 때문이고 이 서쪽골에 마치 병풍을 두른 듯한 형태의 바위가 이어져 병풍바위라 하였다.

공릉동 연혁

1973년7월 도봉구의 신설로 도봉구 공릉동이 외었으면 1988년 1월 1일 노원구 신설에 따라 노원구 공릉동으로 되었다.

최종수정일 : 2020-04-22 17:4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