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연혁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
  • 카카오스토리
  • 트위터
  • 페이스북
  • URL 복사

하계동 유래

한천의 제일 아래쪽에 위치했다 하여 하계동이라는 동명이 유래되었다. 하계동은 조선시대까지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 가좌동(佳佐洞) 용동리(龍洞里),상곡(上谷),상곡리,오목리,양재동,공덕등의 각 일부에 해당되었는데 1911년에는 양주군 노원면 용동리가 되었고 1914년 4월 1일에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하계리로 되었다. 1963년 1월 1일에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면서 설치된 성북구 노해출장소에 속하였다. 1973년 7월 1일 도봉구 하계동으로 되고 1988년 1월 1일에는 노원구 하계동으로 되었다.

하계동은 한천변에 자리하고 있어서 옛부터 들판이 넓고 개울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자연지리환경을 지닌 하계동은 대부분 농경지로 이용되고 군데군데에 산촌(散村) 형태의 자연부락이 몇 개 이루어졌을 뿐이다. 1967년과 1968년에 월곡동,정릉동,길음동을 택지개발하면서 정책적으로 철거민들이 집단이주하여 사실상 하나의 동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가재울은 가좌동(加佐洞),가재동(佳才洞),개잘리,가재동 등의 명칭으로 부르던 곳인데 하천이 맑고 깨끗해서 가재가 많이 잡히는 마을이라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가재울에서 잡히는 가재는 크고 살이 통통하게 배겨서 일품으로 쳐주었다. 12번지 일대이다. 용동은 되룡굴이라고 하는데 조선 개국 직후 이곳에 살던 미꾸라지가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커다란 미꾸라지는 매번 승천할 기회만 엿보고 있던 중 어느날 하늘에서 내려온 천관이 마을 뒷산에 내려와 잠시 사람의 모습으로 화해서 동정을 살피러 간 사이 그 천관의 옷을 가지고 재빨리 숨었다. 동정을 끝낸 천관이 왔으나 벗어 놓았던 옷이 없어 찾던 중 개울 바위 밑에 숨어있는 미꾸라지의 소행임을 알고 크게 꾸짖었다. 이에 미꾸라지는 “천년을 채우면 용이 될 수 있으나 아직 이백년을 더 기다려야 하니 그동안 죽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냐. 그래서 옷을 훔쳤으니 용서해주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 알라 만약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영원히 옷을 주지 않겠다“라는 답을 하였다. 하늘로 올라가는 문의 열쇠가 벗어놓은 옷자락에 들어있는 한 미꾸라지의 소원을 뿌리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미꾸라지와 약속을 한 천관이 옷을 받아입고 먼저 하늘로 올라갔고 위이어 용이 된 미꾸라지가 하늘로 올라갔는데 하늘문에 도달한 미꾸라지의 나이가 모자라 다시 땅으로 떨어진 곳이 바로 되룡굴이다. 용에서 다시 미꾸라지로 되돌아왔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미꾸라지는 굴앞 바위로 떨어져 죽으명서 내뱉은 거품이 마을을 덮었고 이꾸라지의 몸에서 나온 미끈거리는 액체가 근처 바위를 덮어서 이곳의 산은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는 전설을 갖는다. 용동앞에 있는 들은 방아다리와 응개라 했으며 방아다리는 개울 둘이 합하여 방아다리처럼 지형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붙여졌다. 응개 북쪽의 들은 무더미라 했는데 미꾸라지가 떨어져 죽자 불쌍하게 여긴 천관이 묻어준땅이라 해서 붙여졌다. 용개 서쪽의 들은 수멍안으로 저수지와 같은 보(潽)가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다. 물구멍이라 했는데 수멍으로 바뀌어졌다.

하계동을 이룬 옛부락의 하나가 상곡이다. 웃굴,웃골 혹은 하겟굴이라고도 하는데 경춘선 철도 남쪽이다. 웃골의 윗쪽에 있는 골짜기는 구로정이라 하는데 큰반석이 있고 경치가 좋아 노인들의 놀이터로 사용되었다. 노인들이 모이는 정자라는 뜻이다.

70번지 일대로 골짜기에 있는 마을을 골말이라 하고 이 골짜기 윗쪽에는 송충이가 유난히 많아 송충이굴이라 하였으며 그 아래로 흐르는 계곡은 물이 맑아서 빨래터로 마땅한 곳이라 해서 빨랫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빨랫굴 너머의 골짜기는 안계울이라 했는데 이곳에는 큰바위 아래 십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굴이 있었다.

한천변의 한가로운 농촌정경을 지녔던 하계동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경춘선이 가설되면서부터였다. 처음 경춘선을 계획했을 때는 지금 제기동 미도파백화점 자리인 성동역을 출발, 청량리를 지나 중앙선과 평행하여 동쪽으로 거의 일직선방향으로 했는데 중앙선 바로 옆에 새로운 철교가설이 어렵다는 점과 함께 한천을 건너 중화동 방면에서 북행할 경우 봉화산을 낮추고 한천변을 높여야 한다는 공사상 난문제 때문에 현재와 같이 하계동에서 우회하여 다시 남행하였다. 이는 또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가 공릉동에 설립되므로 이와 연결되는 성북역을 출발하여 퇴계원,금곡리,마석,청평,가평,강촌,남춘선을 경유 춘천을 종착역으로 한다. 경성제국대학교 이공학부를 공릉동에 설립하고 경춘선 철도공사가 개설되면서 하계동 지역 사람들을 일일고용원으로 공사판에 동원하면서 한가롭기만 하던 마을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하계동 산 12번지에는 1536년에 이문건이 성주이씨 가문을 찬양하며 부모의 유덕을 추모하며 세운 한글고비와 그의 부모 무덤이 있다. 한글고비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영비로도 부른다. 하계동 32번지에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된 충숙이공영정과 제70호로 지정된 충숙이공신도비가 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굴복에 반대 자결한 동천 이상길(李尙吉)의 묘와 영정으로 1988년 4월 20일에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하계동 연혁

하계동은 조선시대까지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 가좌동 용동리, 상곡, 상곡리, 오목리, 양재동, 공덕동의 각 일부에 해당되었는데 1911년에는 양주군 노원면 용동리가 되었고 1914년 4월 1일에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하계리로 되었다. 1963년 1월 1일에 서울특별시로 편입되면서 설치된 성북구 노해출장소에 속하였다.

1973년7월 1일 도봉구의 신설로 도봉구 하계동이 되었고, 1988년 1월 1일 노원구 신설에 따라 노원구 하계동으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