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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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계동 유래

중계동은 한천의 중간에 위치했다 하여 지명이 유래된 것인데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의 일부 지역으로써 납대동(納大洞),광석리(廣石里),은행리(銀杏里),전주리(全州里),오목리(梧木里),양재동(良才洞)이었다. 1911년에는 양주군 노원명 광석리로 되었다가 1914년 4월 1일 양주군 노원면과 해등촌면을 합쳐 노해면으로 하면서 노해면 중계리로 되었다.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중계동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행정사무는 노해출장소에서 관할하였으며 1973년 7월 1일 도봉구가 신설되자 이의 관할로 되었고 1988년 1월 1일 노원구가 설치되면서 노원구 중계동으로 되었다.

서울의 동북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중계동은 불암산 아래에 위치했는데 많은 사찰이 불암산자락 곳곳에 들어서 있다. 이 가운데 학이 와서 놀 정도로 풍경이 아름다운 곳에 지은 사찰이 학도암인데 이 학도암 바로 아래에 납대울이 있다.

납대울은 납대동이라고도하며 중계동을 이루고 있는 중심마을이다. 조선 선조때 영의정이었던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1533~1601)가 살았던 마을인데 조정에 비치는 조공을 모아놓은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김씨들의 집성통이기도 한 이 납대울에 살았던 곳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김씨들의 집성촌이기도 한 이 납대울에 살았던 윤두수는 평양으로 몽진한 선조를 주변의 여론을 물리치고 연변에 모심으로써 난을 피하게 하는 등 선견지명을 갖춘 사람이다. 납대울에서 한천을 내려다 보면 넓은 들판이 한없이 이어지는데 얕은 구릉이 발끝에서 아물거리며 펼쳐진다. 풍수지리적으로는 이 형국을 노서하전형(老鼠下田形)이라 하여 자손이 번성할 지형의 길지로 본다. 곧 혈 앞에 조 또는 고품(庫稟)형의 사가 있기를 요구하는데 이 사가없으면 쥐가 숨을 장소가 없어서 술개에게 채이던가 또는 굶어 죽게 될 것으로 보는데 이것이 있으면 그 본성을 발휘해서 번성하게 자손을 낳게 되는 형세이다. 납대울에 연립주택과 아파트를 비롯하여 영신여중고가 들어선 것도 바로 이와 같은 풍수지리에 의한 인과법칙에 따른 것이다.

납대울 남쪽 51~61번지 일대를 은행동 혹은 은행마을이라 한다. 수령 800년, 높이 26m, 흉고둘레 6.5m의 은행나무가 중계동 61-22번지에 위치하기 때문인데 마을사람들은 동의 수호신으로 여기고 구룽대감으로 부른다. 때문에 나무를 향해 침을 뱉거나 벌채를 한다거나 욕설도 못하도록 금기시되어 있다. 아이들에게도 나무를 극진히 보호할 것을 마을어른들이 교육시키고 있다. 은행마을은 농촌 고유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나 동네의 서쪽에 대단위 아파트로서 중계동 주공아파트 6,7단지가 들어서 있다. 공사 당시 동네까지 흙먼지가 날리고 공사로 인한 소음 등으로 몹시 소란스럽자 이는 구릉대감이 노해서 그런 것이라며 우려하는 주민도 있었다. 이 마을 뒷산에 있는 소나무를 도당할아버지라고 부르는데 구릉대감과 도당할아버지는 서로 사이가 나뻐서 도당할아버지가 돌아 앉은 것처럼 가지를 도당할아버지는 서로 사이가 나빠서 도당할아버지가 돌아 앉은 것처럼 가지를 옆으로 비끼고 있다. 광석동,광석골,광석마을이라 하는 곳으로 이 마을을 끼고 흐르는 개울에 석영질과 동(銅) 성분이 많은 돌이 있는데 해가 뜰 때 돌에서 광채가 난다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성주이씨 문중토지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전형적인 집성촌을 이루고 있고 서울에서 몇 안되는 씨족마을로 손꼽는다. 이 광석리 옆에 있는 음나무를 도당할머니하고 하는데 은행리의 도당할아버지와는 생전에 부부였으나 죽어서 각각 소나무와 음나무로 환생하였다. 이 두 도당에 대해서는 은행리와 광석리 주민들이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해마다 음력 10월 초하루부터 초사흘까지 제사를 지내는데 부정을 타지 않은 사람 가운데 낮은 하주와 선하주를 선정한다. 이 행사는 마을의 큰 행사의 얼마전까지도 마을 제사가 있을 때는 외지에 나갔던 사람들도 찾아올 만큼 큰 행사로 여겼다. 뒷골은 26번지 일대인데 공릉동과 접한 곳이다. 중계동 가운데 가장 안쪽에 자리잡았으므로 붙여진 명칭인데 후동(後洞) 혹은 안동네라고도 한다.

무시울은 무수동(無愁洞)혹은 무시울이라 하는데 산 104번지 일대이다.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서 앞이 안보인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1967년에 청량리 일대 철거민의 이주정착지로 지정하였는데 1972년 2월 11일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고시되었으며 1987년에 산림청으로부터 불하를 받았다. 무시울은 공릉동 172번지일대의 무시울과도 혼동하기도 하는데 공릉동의 무시울이 훨씬 역사가 오래 되었다. 중계동 뒷산인 불암산은 일명 천보산이라고도 하는데 이 산에는 사랑바위,말바위,용바위,눈바위 등의 이름을 가진 바위가 많다. 사랑바위는 두 사람이 앉아 서로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좋은 장소라 해서 붙여진 명칭인데 실제 사랑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장애가 뒤따르는 사람들이 이 바위 위에서 서로 포옹을 하며 진실된 사랑의 약속을 나누면 그 사랑이 이루진다는 전설이 있다. 눈바위는 하늘이 맑지만 바위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면 비가 오는데 아마도 땅위의 습기가 올라가다가 맺혀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눈바위에 물방울이 맺힌 것과 관련하여 실제 비가 내리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기는 매우 어렵다. 음바위는 바치 여성의 생식기모양으로 생긴 바위인데 이 바위에 돌을 끼워 놓으면 마을 남정네들이 바람을 피워 외지로 떠나버려서 마을에는 여자들만 남게 된다는 전설이 있는데 주민 가운데 한사람은 사람들이 바위에 돌을 끼우지 못하도록 지킨 일도 있다. 마을이 비교적 여세(女勢)가 강한 것은 바로 음바위가 있기 때문인데 바위가 있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옛날에는 남성들이 가만히 있고 제주도와 같이 여성들이 모든 일을 했다고 한다. 음바위가 있는 골짜기에서 사랑 바위쪽으로 연결된 곳을 까치골이라 하는데 떼까치 서식처여서 까치가 많이 울어서 붙여진 명칭이나 지금은 옛날처럼 까치가 무리로 서식하지는 않는다.

중계동의 학도암을 비록하여 수락산 자락에 인접한 상계동에는 학포지란 형국의 자리에 자리잡은 나한도량인 학림사 등 많은 사찰이 있는데 학림사는 조선왕실의 자복사찰로 이용되었다. 광석리 옆에 붙은 지역을 전줏골 혹은 상계,전주리라 하는데 성주이씨가 사는 마을인 광석리를 전주 이씨가 샀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중계동 183번지는 조선시대의 회곽묘(灰槨墓)가 발견된 곳이기도한데 조선시대의 상제(喪制)연구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해발 420m의 불안산2봉은 산성터가 남아있는데 아마도 삼국시대부터 중요시 되어왔던 이 지역의 봉수대터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갖는 지역이다.

중계동 연혁

1911년에는 양주군 노원면 광석리로 되었다가 1914년 4월 1일에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과 해등촌면을 합쳐 노해면으로 하면서 중계리가 되었다.

1963년 1월 1일에 서울특별시 성북구 중계동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행정사무는 노해출장소에서 관할하였으며 1973년7월 1일 도봉구의 신설로 관할구역이 변경 되었고, 1988년 1월 1일 노원구가 설치되면서 노원구 중계동으로 되었다

최종수정일 : 2020-04-22 17:4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