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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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계동 유래

한천(漢川)의 맨 윗쪽부분에 자리잡았다 하여 상계동이라는 명칭이 우래되었는데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목 노원면과 별비곡면(別非谷面),둔야면(芚夜面)의 일부 지역에 해당되었다. 이때 있었던 마을로는 노원면의 간촌리(間村里),온수동(溫水洞),갈월동,(葛月洞),원터(院基洞),당현(堂峴),녹천,조암동(鳥岩洞),장자동(長者洞),불암리(佛岩里),덕릉현(德陵峴) 등의 자연부락이다.

1911년에는 양주군 노원면 간촌리 ,온수동,녹천리, 별비면, 덕동리, 둔야면 조암동으로 되고 1914년 4월 1일에는 양주군 노원면과 해등촌면이 통합되면서 양주군 노해면 상계리로 되었다.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상계동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행정사무는 노해출장소에서 관할하였고 1973년 7월 1일 도봉구의 시설로 이의 관할이 되었다. 1988년 1월 1일 노원구가 신설되면서 노원구 상계동으로 되었다.

서울의 동북부를 남북으로 흐르고 있는 한천(漢川)의 가장 상류부분에 위치한 마을인 상계동은 제1동에서 제10동까지 19개의 행정동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전체면적은 10.06㎢로 노원구 면적의 28%를 차지하고 있다. 서울 동북부의 끄트머리에 위치하여 경기도 남양주군 별내면 청학리와 의정부시와 시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수락산과 불암산이 동의 동북쪽에 각각 위치하고 있어서 동면적의 많은 부분은 이 두 산에서 이어진 산자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상계1동과 상계4동의 경우는 주거면적보다는 임야의 면적이 더 넓어서 이 산골짜기에서부터 시작된 크고 작은 계곡물이 모여 당현천으로 모여들고 다시 중랑천과 합쳐지므로 가히 계곡에 자리잡은 마을이라는 것을 실감나게 해준다. 상계동에는 노원역과 노원(蘆院)이 있었다. 노원역은 상계2동과 상계10동 일대에 자리잡았는데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노원면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양주도호부의 관할구역에 포함되었는데 병조(兵曺)의 직할역이었다. 동북 방면의 역로(驛路)와 연결된 노원역은 대로(大路)에 속하여 20결의 공수전(公須田)을 지급받고 마필(馬匹)을 관리하였다.

서울에서 30리마다 도로변에 설치한 것이 역인데 노원역의 경우 흥인문 밖 4리(지금의 40리)에 위치하여 동북방면의 여러 역로(驛路)와 연결되었다. 공문 전달, 관물, 및 세공의 수송, 관료 사행의 마필 급여와 숙식 제공, 변경의 군사사정 보고,민정시찰,비행관리규찰 등을 위해 중아에서 관리를 파견할 때 이들 파견관이 이용하는 고이 역과 원의 기능이었다. 상계초등학교와 노원전철역 미도파백화점이 있는 곳이 바로 노원역과 노원이 있던 곳이어서 이곳을 원터 혹은 원기동(院基洞)이라 하였다. 갈대밭으로 이루어진 이곳에 노원역이 생기면서 부근에 인가가 형성되기도 하였는데 태조 이성계가 서울에 도읍을 정하고 종묘와 사직의 위치를 잡기 위해 고심할 때 이 일대를 살펴보고 종묘의 자리로 정했으나 부근에 사직단을 세울만한 곳이 없어 포기했던곳이기도 하다. 아쉬워하면서 서남쪽으로 옮긴 곳이 지금의 경복궁 자리인데 양주목의 세력이 워낙 컸던 관계로 노원을 목으로 승격시키지 못하고 종묘터로 생각했을 만큼 대지(大地)였던 이곳을 원(院)으로 하여 국가공무에 필요한 제반사항을 지원하는 장소로 삼게 되었다. 이제 설치된 노원은 북쪽으로 여행하는 공부집행자는 물론 사적인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즐겨 이용하곤 했는데 노원역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양주목사의 간섭이 심하였다. 특히 역과 원의 필요한 경비사용을 위해 주어지는 전답의 수확물은 양주목사의 사욕(私慾)으로 채워지기가 일쑤여서 소속 관원들의 고통은 매우 컸다. 마들이라 부르던 곳에있는 노원역의 공수전은 인근 마을사람들이 소작을 지었는데 가을철에 양주목사에게 추수한 것을 갖다 바치면 늘상 모자란다 하여 다른 것으로 분량을 채웠으므로 맞들어야 한다는 표현을 하여 마뜰이라는 명칭이 되기도 했다. 한편 원터 바로 앞이 되는 들판이었는데 지금의 도봉면허시험장자리이다. 이곳을 새머리 혹은 조두(鳥頭)라 불렀는데 후일 「새」와 뜻이 같은 신(新신)으로 바뀌어져 신두(新머頭리) 혹은 신머리라고도 불렀다. 원터의 지형은 새의 몸과 날개 부분에 해당하고 면허시험장 쪽이 새의 머리부분에 해당되는 곳이며 중랑천을 향해 고개를 돌려 물을 먹는 형국이어서 이런 지세를 풍수상으로는 학조음수형(學鳥陰水形)이라 하였다. 좌우 날개에 행당하는 곳으로는 지금의 지하철 4호선이 동 서로 통과하고 있으며 몸통부분에는 백화점이 들어섰고 발과 꼬리부분으로 알을 낳은 곳은 상계6,7동으로 주공아파트 3~6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원터 옆의 들은 소고지라 불렀는데 현재 노원구청이 들어서 있는 자리로 칡등 소가 좋아하는 풀이 많이 자라므로 사람들은 이곳으로 소를 끌고와 풀을 먹이던 곳으로 소가 많다는 뜻으로써 소꼬리지, 소꼬지등으로 불렀다. 중랑천 지류와 당현천 지류가 원터 쪽으로 흐르는 곳에 있던 들판은 앞오랑께라 하였고 원터 바로 앞의 들판은 이랑개라하였다. 주공아파트 6단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밭이랑이 멀리서도 가지런하게 보여 이랑개라는 명칭이 붙었으나 지금은 아파트동(棟)이 가지런히 서있다. 창동 차량 기지쪽을 오장골이라 부르고 이곳에서 대림,임광아파트 쪽은 침저꿀이라 불렀는데 오장굴보다 지역이 낮아서 붙여진 명칭이었다. 한편 보람아파트와 주공14단지, 동대문상고가 있는 일대를 온수동(溫水洞),온숫굴,원수동의 이름으로 불렀는데 더운 물이 솟아나온다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광해군 때 처음 온수가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땅에서 더운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자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좋은 기운이 뻗쳐오르기 때문에 나라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국토가 유린당하고 훼손당하여 온전하게 남아있는 곳이 거의 없을 정도였기에 땅이 더워지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로 보아길조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양주 회암사의 승려 한사람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땅에서 더운 김이 나오는데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한 것을 보고 뜨거운 땅바닥 때문에 반드시 일이 생길 것이라며 그 자리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예견하던 사람들이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회암사 승려는 “땅에서 김이 오르는 것은 땅 속의 기운이 뻗쳐 더 이상 버티지 못해 밖으로 발산을 하는 것이다. 땅밑에는 대개 찬물이 흘러서 이를 마시고 사용하는 샘물로 쓰는데 더운 물이 나온다면 이는 특이한 경우이므로 관청에서 조사를 나오고 관리하자는 말이 올 것이다. 옛부터 큰 일이 있으려면 땅이 갈라지거나 태풍이 오지 않으면 며칠씩 천둥번개가 치는등 날씨에 변화가 생기고 덩달아 만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겨울에 매화가 핀다거나 제비가 날아오는 일도 그렇지만 한여름에 나뭇잎이 떨어지고 서리가 맺히는 것도 모두 하늘의 뜻을 그르쳐서 생기는 일이니 이럴때면 천문감에서 즉시 임금님께 상황을 보고하는 법인데 하물며 땅속에서 더운 김이 솟아올라 물이 나오는 일에 대해 관청에서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라 하면서 부적을 하나 써 주었다. 일리가 있는 이 말에 사람들은 땅에서 더운 김이 솟아오르는 것에 대해 오히려 불안하게 여기면서 더운 김이 오르고 뜨거운 물이 소아나온다는 사실을 누설치 말도록 하면서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예견해 준 회암사 승려에게 듬뿍 시주를 해주었는데 승려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후일 이 근처에 절을 짓고 온수사(溫水寺)라는 절 이름을 붙일 것을 당부하였다. 승려가 지나가고 얼마되지 않아 마을 한복판에서 뜨거운 물이 한길이나 솟아오르면서 동네 한 가운데를 내를 이루며 흘러내리자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피할 일이 아니라 생각하여 양주관아에 보고하였다. 때마침 광해군이 이북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 교동의 뜨거운 방안에 가두어 죽인 일이 있어 나라 안이 부산했기 때문에 양주목사는 뜨거운 물이 솟아올랐다는 사실을 나라에 보고하지 않아 무마되었다. 행여하며 불안해하던 주민들은 더운 물이 솟아오르는 곳의 구멍을 막고 승려가 준 부적을 붙이자 더 이상 온수가 솟아오르지 않았다. 회암사 승려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은 그 자리에 절을 짓지않고 빈터로 내버려두었는데 땅 위로 석상(石像)이 한 개 불쑥 솟아오르자 사람들은 절에 모실 부처님이 나타난 것이라며 합장과 기도를 하였다. 이 석상은 조선후기까지도 남아있어 더운 물이 솟아난 자리를 알 수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없어져버려 사람들은 더운물이 솟아올랐다는 자리를 알수 없게 되었다. 온수동 바로 아래에는 도두머리라는 뚝이 있었다. 원래 도투락머리라고 불렀던 것이 도두머리로 바뀌어졌다. 어린 여자아이의 머리에 매다는 도투락머리라 해서 부잣집 여자아이의 상징이었는데 온수동이 비교적 부촌이어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였다. 보람아파트 일대에 들어서기 전만해도 이 일대는 배밭이어서 비교적 소득이 높았다.

상계동1122번지 일대는 갈울이라 했는데 갈월(葛月),갈울 혹은 갈월동으로도 불렀다. 산 밑으로 우묵하게 들어가 있어서 마치 초승달 모양으로 생긴 이 마을은 상계동 넓은 지역 가운데 개발붐을 타지 않고 아직까지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동이며 노원구 지역중에서 유일하게 토착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갈바다 혹은 칡바다라는 이름으로 부르던 갈울은 칡이 많이 자라고 있어서 붙여진 명칭인데 갈해동(葛海洞)이 갈월동(葛月洞)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갈울에는 수락산계곡에서 발원한 갈월천이 흐르는데 지금은 절반 이상이 복개되었다. 밝은 물이 흐르고 곳곳에 반석이 놓여진 갈울천변은 1070년대까지만해도 수락산을 찾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쉼터였다. 이 갈월천 상류 동쪽계곡의 점곡(點谷)이라는 곳에서는 매년 2월초와 10월초에 산신제를 지낸다. 가서반이라 부르기도 하는 이곳에서 지내는 산신제는 약 600년 전부터 계속되어오고 있는데 길한 집안의 사람을 제관으로 하여 동네의 안녕과 농사의 풍년을 비는 제례인데 지금은 그 규모가 대단히 축소되어 노인들만의 행사로 전락되고 있다.

상계동 1240번지 일대는 백운동이라 부른다. 바위가 곳곳에 허옇게 드러난 수락산의 절경이 골짜기의 계곡과 어우러져 마치 흰구름이 머무는 것처럼 보인다하여 붙여진 명칭인데 멀리서 보면 산중턱에 드러난 바위가 마치 흰구름이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 백운동을 이어주는 것을 백운계곡이라 하는데 이 역시 서울사람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장재울을 의정부시와 장암동의 경계부근에 있다. 실학자인 서계 박세당(西溪 朴世堂:1629~1703)이 제자들과 학문을 토론하기 위해 자주 들린 곳인데 기산정(箕山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 및 바위에는 그가 썼다는 서계유거(西溪幽居),취승대(聚勝臺),석촌동(石泉洞)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그가 손수 심었다는 느티나무도 남아 있다. 학문의 거장이면서 인품됨이 관후장자(寬厚長者)한 서계가 살았던 곳이라 해서 장자동이란 명칭이 붙었는데 장재율,장자울이라고도 한다. 상계동 111번지, 지하철 4호선 당고개역이 있는 곳은 원래 당현(堂峴)으로 부르던 곳이다. 당고개라고도 하던 이 곳은 사도세자를 보시던 궁져이씨와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내의원봉사, 내의원봉사의 조카에 얽힌 사연을 갖고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고개를 넘는 사람들이 동맹이를 쌓아올리고 기도를 하는 성황당으로 변했다. 수락산 산자락이 바로 이어지는 이곳 역시 오래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사람들의 거주역사도 깊다. 남양주군 별내면과 경계지점을 덕릉고개라 하는데 한자로는 덕릉현(德陵峴)으로 쓴다. 이 고개는 선조의 생부 덕흥대원군의 묘소가 있어서 이름이 연유되었다. 효성지극한 선조가 생부의 묘소를 능으로 승격시키지 못하자 꾀를 내서 소문으로 만든 것이 덕릉으로 되었다는 전설을 안고 있다. 벽운동과 갈울 사이에 있는 마을은 사잇말이라 하였는데 한자로 간촌리(間村里)라 불렀으며 한때 상계동을 자칭하는 동명이 되기도 하였다. 사잇말은 줄여서 새말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졌는데 이를 한자로 옮긴 것인 신촌동(新村洞)이고 이와 음이 같다는 뜻에서 새암동이라 했는데 일제 때 조암동(鳥岩洞)으로 붙여졌다. 원터와 중계동의 전줏골(全州洞) 사이에 있는 마을은 사잇말이라 했는데 줄여서 샘말이라 했고 한자로 간촌(間村)이라 했는데 조암동을 간촌리라 했던 것과 자주 혼동하여 부르므로 마을 사람중에는 샘을 한자로 옮긴 천(泉)으로 읽는 경우도 많았다. 수락산자락에 위치한 까닭에 이외에도 바위와 관련된 유래도 많은데 치마를 펼쳐놓은 것과 놓여있어 흔들면 들썩거린다하여 들썩바위가있다. 불암산 자락에는 가마처럼 생긴 가마바위를 비롯해서 수십길이나 되도록 계속 바위가 널려있는 것처럼 되었는 너러바위, 창살처럼 생긴 창살바위가 있다.

상계동 연혁

1911년에는 양주군 노원면 간촌리, 온수동, 녹촌리, 별비면 덕동리, 둔야면 조암동으로 되고 1914년 4월 1일에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과 해등촌면이 통합되면서 양주군 노해면 상계리가 되었다. 1963년 1월 1일에 서울특별시 성북구 중계동으로 편입됨과 동시에 행정사무는 노해출장소에서 관할하였으며 1973년7월 1일 도봉구의 신설로 관할구역이 변경 되었고, 1988년 1월 1일 노원구가 설치되면서 노원구 상계동으로 되었다.